[인터뷰] 《거울에 비친 왕관》의 임다일 작가님
올해도 어김없이 인터뷰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특히 올해는 계약 작가님들이 많이 계셔서 인터뷰 역시 여러 번 진행되었는데요.
첫 번째로 작년 리디북스 유료 연재(작년 12월~7월)를 거쳐 지난 9월 이북으로 출간된 《거울에 비친 왕관》의 임다일 작가님과의 인터뷰를 공개합니다.
인터뷰 참고 사항
11월 22일부터 23일까지 메신저를 통해 진행하였습니다.
- 중요한 내용은 질문지를 사전에 보내드려 답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드렸으며, 하기의 네 가지 안내를 인터뷰 전에 고지하여 작가님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1. 편집 과정을 거치기는 하겠지만 되도록 보내주신 문장을 살릴 예정입니다.
2. 독자분들의 작품 감상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가능한 한 스포일러를 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3. 공개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대답이 어려운 질문은 넘기셔도 상관없습니다. 혹 뒤늦게 수정하거나 삭제할 부분이 떠오르셨다면 공개 전, 한 번 더 작가님께 확인 메일을 발송해 드리오니 그때 말씀해 주세요.
4.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질문지에는 없는 돌발 질문이 날아갈 가능성이 크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주세요.
- 편집자 주는 괄호 안에 * 표시를 넣은 뒤 이탤릭체로 표시하였습니다.
스페인 덕질과의 두 번째 만남
당수: 안녕하세요, 임다일 작가님.
임다일: 안녕하세요!
당수: 덕녘 최초의 2회차 인터뷰입니다. 기분이 어떠세요?
임다일: 지난 인터뷰가 재밌었기 때문에 오늘도 기대는 되는데요. 예전 인터뷰를 읽어 보니까 지금 보기에는 뭔가 좀 민망한 소리들도 있어서 또 새로운 흑역사 적립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근데 어떻게 해도 나중에 보면 민망하겠죠.
당수: 2016년 《밀회 아틀리에》 인터뷰 이후 무려 2년 만입니다. 신작 완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임다일: 아뇨. 《거울에 비친 왕관》을 처음 시작할 때는 지금 분량의 딱 절반 정도를 상상했어요. 분량 잡을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엄청나게 작업속도가 느리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래도 《밀회 아틀리에》 때보다 빠르긴 한데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많아요.
당수: 신작을 완결 낸 뒤 덕녘과 인터뷰할 거라는 예상은 하셨나요?
임다일: 아뇨. 다른 작가님들이 여럿 계신 덕택에 끼어들 수 있었습니다.
당수: 저도 몰랐습니다. 2년 전 인터뷰에서 신작은 다른 데서 내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왜 또 이렇게 됐을까요? 다음 신작은 꼭 다른 좋은 출판사에서 내세요. 인터뷰 3회 불가능!
임다일: 네!
당수: 첫 인터뷰 때와 비교하면 마음가짐이나 취향 등의 변화가 있나요?
임다일: 두 작품의 분량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거울에 비친 왕관》이 두 번째 작품이지만 마치 첫 번째 같은 기분입니다. 얼떨떨하고 뭔가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전해요.
그리고 일단 좋아하는 걸 잔뜩 쏟아부었으니 이제는 좀 주변을 살피면서 써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취향의 변화는 곧바로 생각나는 게 없네요. 19금 취향이 좀 더 건전(?)해졌다는 정도?^^;
당수: 기본 취향은 안 변하신 것 같아요. 《밀회 아틀리에》 이후 또 스페인 덕질 책입니다. 인명, 지명, 사건, 시대상 등도 이전 책보다 훨씬 더 스페인 덕질에 가까워졌죠. 언제까지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책을 쓰실 건가요?
임다일: 저도 모릅니다. 그냥 거의 기본장착 수준이라서요. 어쩌겠어요. 자꾸 그런 것만 떠오르는데! 그렇지만 진짜 역사물을 쓰지 않는 한 《거울에 비친 왕관》처럼 열심히 덕질하는 이야기는 안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힘들어서라도요ㅠㅠ
당수: 《거울에 비친 왕관》 집필 당시 고증에 많이 신경 쓰셨죠.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부분이 왕들의 부유함을 보여주기 위해 ‘얼음’을 사용하신 거였습니다.
특히 주인공들이 스페인 역사 속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인물들(* 《거울에 비친 왕관》은 스페인의 부부왕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계약 결혼을 모티브로 창작된 소설입니다.)이라 더욱 고증에 힘을 쏟으셨는데요. 꼭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있나요?
임다일: 원래는 16세기 스페인 역사물을 쓸 생각이었습니다. 배경 지식을 위해 이런저런 책을 보다가 ≪스페인사≫(레이몬드 카 외, 까치)라는 책을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요. 이사벨이 남편에게 한 말이 눈에 들어왔고, 너무 멋있어서 표시해 놨습니다. 그 문구 자체에 담겨 있는 부부 사이의 긴장이 흥미로웠어요.
그리고 이사벨 사후 페르난도는 굉장히 탐욕적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그동안 아내에게 억눌려 지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니, 대체 어느 정도길래 억눌렸다고 할 수준이야?’ 싶은 마음에 더 알아보다가 재밌겠다, 써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닿았어요.
당수: 집필 계기가 된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관계에 비하면 《거울에 비친 왕관》의 레이테는 에르난을 그다지 억누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임다일: 레이테가 협박처럼 말했던 대사의 원래 문구는 결국 부부 사이가 동등하지 않고 긴장과 갈등이 있다는 반증이 됩니다. 하지만 레이테랑 에르난의 세계는 꿈과 희망의 로맨스 판타지이므로 서로를 존중해 주는 형태로 가기 위하여 적당적당히...(...)
일하는 왕들의 정치 로맨스
당수: 그럼 소설 내용에 관해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거울에 비친 왕관》의 초반은 속도감 있는 여왕 구출로 시작하지만 곧 정치적인 이야기로 흐릅니다. ‘로맨스’ 강화를 위해 적당히 스킵하고 넘어갈 법한 내용을 모두 살리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임다일: 주인공이 둘 다 왕이어서요. 직무 태만한 왕을 못 쓰겠습니다. 하지만 다음에는 왕이든 대공이든 공작이든 높으신 분을 주인공으로 쓰더라도 연애만 시킬 거예요. 일하는 내용을 쓰니까 힘들었어요ㅠㅠ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집필 계기를 생각하니 어찌 보면 예정된 일이었구나 싶더라고요. 왜냐면 모티프가 된 문구 자체가 권력의 경쟁을 나타내거든요. 쓰기 시작할 때는 저 자신도 이 이야기가 어떤 색이 될지 잘 몰랐던 거죠. 근데 쓰다 보니...(...)
아무튼 핵심은 왕인데 일을 안 시킬 수가 없어서입니다. 다음에는 노는 왕 할 거예요ㅜㅜ
당수: 물론 《거울에 비친 왕관》 세계 내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에르난과 레이테의 결합을 확고하게 만들려는 노력이죠. 그래서 읽다 보면 주인공들의 관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는 합니다. 하필 둘 다 왕이라 그게 국가 간 외교가 돼서 그렇죠.
임다일: 왕끼리의 결합은 결코 개인적인 게 될 수 없는걸요. 물론 많은 이야기들이 공적인 부분을 단순하게 하고 넘어간다는 건 압니다. 제 나름대로 정치와 사랑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함께 가도록 신경 썼습니다. 앞으로 왕끼리 결혼하는 거 절대 안 쓸 거예요.
당수: 너무 공적이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왕들의 사적인 이야기도 다뤄 보죠. 계약서대로 에르난이 먼저입니다.
에르난은 왕이자 로판 남주로서 누릴 법한 매력적인 설정을 얻지 못했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고증을 따르느라 그러셨겠지만 에르난의 초기 야망이었던 ‘전쟁 영웅이 되어 사크틸라에서 왕으로 입지를 굳히자’는 결심조차 《거울에 비친 왕관》이 끝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임다일: 그게 현실성 없는 꿈이었다고 자각하잖습니까!(...)
당수: 절대 권력을 지닐 수 있는 캐릭터가 주인공인데 그렇게 쓰지 않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임다일: 실제 인물과 시대를 바탕에 깔아 두고 하다 보니 거기에 너무 묶여 있지 않았나 싶더라고요. 실제 그들의 삶을 그대로 따라간 건 아니지만, 제 생각 자체가 ‘15세기 후반 스페인’이라는 틀을 맞추려 했어요.
당수: 결국 에르난의 제일 뛰어난 부분은 밤일 아닌가요. 무려 동정인데 절륜한...
임다일: 판타지니까! 존중해 주십시오, 취향입니다. 19금 남주가 안 절륜하면 말이 됩니까, 그게.
당수: 원래 작가님 취향은 금욕적인 기사 아니었습니까?
임다일: 금욕적인 캐릭터의 매력은 본래의 금욕 상태와 그 금욕이 터질 때의 차이입니다. 그게 어디서 터지겠습니까.
제 취향은 금욕적이거나 고지식한 캐릭터인데 여태 주인공들이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건 사실입니다. ‘이러저러한 성향의 캐릭터를 쓰겠다!’라는 데에서 출발한 글이 아니고 주제나 이야기를 먼저 정해 두고 그에 맞춰 소설을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금욕캐가 드문 건 이유가 있습니다. 서사가 안 나와요.
제가 정말 쓰고 싶은 금욕은 좀 더 괴로워하고 번민해야 합니다. 좀 더 신사적이고 고지식하고요. 언젠가 제 취향 백 프로의 꿈의 남주를 꼭 쓸 겁니다ㅠㅠ
물론 그렇다고 세필로나 에르난이 제 취향이 아니라거나 억지로 쓴 건 아닙니다. 둘 다 좋아해요.
당수: 에르난이 등장하는 장면 중에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임다일: 바로 떠오른 건 1부 끝에서 탐브레와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새벽인데요. 왜냐면 《거울에 비친 왕관》을 시작할 때 그 장면을 너무나도 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떠오른 건 눈밭에서 레이테와 놀다가 프란세스크의 집에 쳐들어가는 장면입니다. 너무나 즐기면서 썼어요. 또 레이테가 방에 들어온 프란세스크와 대화하자 에르난이 ‘다른 폐하는 반대야.’라면서 유치하게 질투하는 척하는 장면도 좋아해요.
그리고 에르난이 신년연회 때 선물을 뜯어 보다가 빨간 책 보던 과거가 들통나자 민망해하는 거! 첫날밤 후에 쫓겨나는 것도. 브라간사에게 붙들리는 그 순간도! 너무 쓰고 싶어서 근질거렸어요.
그런데 말하고 보니 어째 남주의 포스라기에는 다 곤란한 장면만 있네요. 에르난 굴욕이네. 미안해.
당수: 에르난이 당황하는 거 좋아하십니까?
임다일: 네^^ 여주는 못 괴롭히겠고 남주 괴롭히는 게 좋아요^^ 골려주고 싶어요.
당수: 하지만 그런 에르난도 잠자리에선 절륜하다? 로판 신의 가호로? 사기캐라면 사기캐네요.
임다일: 현실에 없을 주인공 나오는 게 로맨스 아닙니까.
당수: 그럼 여주인공 레이테의 얘기를 해 봅시다.
레이테는 전작 《밀회 아틀리에》의 발랄한 공주님 미엘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습니다. 섬세하고 예민해서 깨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라는 감상도 있었죠. 남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안한 왕으로서의 입지를 자신의 힘으로 지키고자 노력하는 레이테를 보고 있으면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어차피 가상의 세계관인데 레이테에게 고구마를 그렇게 먹인 이유는?
임다일: 일단 고증을 따르다 보니(...) 두 왕의 결합은 이사벨의 의지가 커서 가능했습니다. 그 의지라는 게 결국 권력욕이죠. 그러니까 애초에 권력욕이 강한 여캐를 쓰고 싶었기 때문에 가만히 보호받는 캐릭터와는 좀 거리가 멀어졌네요. 레이테가 직접 칼 들고 나서는 건 아니지만요.
그리고 레이테의 불안한 입지는 결국 남존여비적인 세계의 문제가 큽니다. 나중에는 성 평등 세계를 쓰자고 결심했습니다. 저도 답답했어요 어흑. 판타지 세상을 쓰겠다고 이를 갈았습니다.
당수: 고구마의 가장 큰 문제는 레이테가 그렇게 노력하고 괴로워했는데도 사이다가 안 온다는 거였습니다. 정치적 숙적이나 억압하는 존재는 전부 다른 이들이 제거해 버리고, 레이테를 괴롭게 한 후계자 문제도 결국 레이테의 임신으로 끝나죠.
임다일: 세계 자체가 뿅 변하지는 못하니까요. 억압하는 이를 다른 사람이 처리하는 건 처음부터 생각했던 겁니다. 그걸 계기로 레이테가 상대방을 경계해야 하니까요. 임신의 경우에는 성별을 떠나서 왕인 이상 대를 이어야 하는 게 의무니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확 시원하게 터지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면에서 왕으로서의 힘을 유지하는 정도로 쓰게 되었어요. 《거울에 비친 왕관》은 여주가 남주를 이기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가는 얘기니까. 근데 그 동등한 게 판타지네요...^^;;
당수: 현실적인 면을 살리다 보니 레이테도 에르난과 마찬가지로 왕인데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제대로 된 대리만족을 못 느낀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세스크나 여러 사건을 일으키는 브라간사 등 조연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임다일: 아까 했던 얘길 반복하는 셈이지만, 15세기 후반이라는 세상에 제 머리가 갇혀 있었던 게 근본적인 이유라고 봐요. 그리고 레이테와 에르난에게 휘하의 귀족 등은 없애야 할 적이 아니라 애증이든 뭐든 품고 가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브라간사처럼 막 나가질 못했어요. 주인공은 신경 쓸 게 많아서요.
당수: 그런 의미에서 나중에 레이테가 귀족들 앞에서 권위를 내보이고, 갑옷을 입고 당당하게 나서는 장면이 굉장히 멋있었습니다.
임다일: 저도 레이테가 등장하는 장면 중 그 장면을 제일 좋아합니다.
당수: 하지만 그 뒤에도 레이테는 중압감을 못 이기고 고통스러워하거나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죠. 솔직히 갑옷 하나 입었다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안타까웠어요.
임다일: 원래 처음에는 레이테를 전쟁터에도 안 보낼 뻔했어요. 근데 그러면 주인공의 포스가 너무 안 살더라고요.
레이테가 귀족들한테 권위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쓸 때 처음에는 저도 레이테를 따라서 너무너무 어색했어요. 그래서 진짜 어색해 보였을 텐데 조금씩 자연스러워져 갔죠. 줄 수 있는 사이다란 게 그게 전부라는 점이 뭔가 민망하긴 하네요.
당수: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끝없이 노력한 게 레이테의 멋진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한계에 부딪혀도 변화를 주려 노력하는 자세가 멋진 거 아니겠습니까. 현실이 그렇죠. 노력하면 아주 조금씩 바뀔 뿐, 한꺼번에 모든 게 달라지는 사이다 같은 건 없으니까요.
임다일: 애초에 레이테는 세상을 바꿨다기에는 그냥 권력으로 찍어누른 셈인데요. 이 역시 실제의 이사벨이 그랬고 실제의 세상을 제가 너무 의식한 결과가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저 나름대로 희망적인 것처럼 엔딩을 냈습니다! 뭔가 말하고 나니 비관적인 것 같아서(...) 꿈과! 희망의! 로판 세계!
당수: 결국 블랑슈 왕비가 했던 말이 《거울에 비친 왕관》의 감상 포인트가 아닐까 싶어요.
《거울에 비친 왕관》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딱 그 마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 세계와 완벽한 캐릭터가 아니라 차차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임다일: 여러모로 많이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었으나 약간의 긍정적인 희망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왕을 닮은 최측근들
당수: 세계관/설정 작업을 하면서 특별히 신경 쓰셨던 부분이 있나요?
임다일: 눈에 보이는 디테일보다는 15세기 후반 르네상스, 서유럽 세계의 틀 안에 존재하는 사고방식을 많이 의식했어요.
세계관 자체는 이름 장난이 재밌었어요. 거의 대부분 실제 지명의 어원을 찾아서 썼습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왕관》은 실제 역사물이 아니니 사크틸라와 바르시나가 서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유치하더라도 쉽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당수: 구닥다리 취향에 신앙심이 깊은 사크틸라와 사치스럽고 신앙심이 부족한 바르시나의 대비처럼요?
임다일: 그것도 그렇고, 가장 차이를 둔 건 왕권에 대한 귀족층의 태도입니다. 사크틸라는 왕권에 집중되는 형태지만 레이테의 숙부 때문에 그게 좀 흐려 보이죠. 그래서 바르시나에서 귀족들이 왕을 견제하는 모습을 또렷하게 강조하는 형태로 차이점을 보여 주었습니다.
당수: 아무래도 유교 사상에 물든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바르시나 귀족들이 왕을 몰아세우는 모습이 굉장히 외국(?) 같았어요.
임다일: 조아라 연재 때부터 그런 부분을 특이하게 여기는 반응을 봐 왔습니다. 정확히는 당수 님이 방금 말씀하신 대로 어색하게 받아들이시더라고요. 왕한테 이러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근데 그거 고증 어긴 게 아닙니다.
당수: 재밌는 건 왕의 최측근들은 국가별 특성과는 캐릭터가 다르다는 점인데요. 왕한테 호통까지 치는 건 왕권이 강화된 사크틸라의 시스로네스고, 투덜거리면서도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건 지방 세력이 강한 바르시나의 프란세스크거든요.
임다일: 일단 시스로네스는 스승 같은 느낌에 정치인이고 프란세스크는 에르난의 친구라는 포지션의 차이가 있습니다. 프란세스크는 고위귀족이고 측근이고 친구일 뿐, 정치인은 아니라는 면을 계속 의식했어요.
당수: 말이 나온 김에 두 사람 이야기를 더 해 보겠습니다. (* 이때 막 날이 바뀌었습니다.) 오, 이틀째가 되었습니다.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임다일: 오오, 또 장장 이틀에 걸친 인터뷰네요. 어깨가 아픕니다. 근데 뭐 맨날 아파요. 누우면 더 불편해서 앉아서 하고 있습니다.
당수: 조아라 연재 때는 시스로네스의 서사가 외전을 통해 조금 더 드러났었거든요. 원래 프란세스크도 외전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더 하려고 했는데 안 쓰셨죠. 세스크 외전은요?
임다일: 언젠가 쓰겠습니다...(...)
당수: 시스로네스 외전을 유료 연재와 이북에서 제외하신 건 중심 스토리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여서인가요?
임다일: 네. 저는 시스로네스에게 애정을 팍팍 담았지만 독자님들 입장에서는 관심 없을 인물이 아닌가 싶어서요.
당수: 저는 시스로네스를 굉장히 신선하게 봤습니다. 대검까지 휘두르면서(...) 여주인공을 비호하는 노인 캐릭터라는 점에서요. 만약 시스로네스가 젊은 남자였다면 에르난의 질투도 더 모락모락 피어나지 않았을까요?
임다일: 역시 그게 15세기 후반이라는 세상에 제 머리가 갇혔다는 증거 중 하난데요. 왕의 조언자는 고위 성직자니 나이가 많을 거라는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젊은 캐릭터였다면 더 그럴듯하긴 했을 거예요. 그렇다고 시스로네스를 쓴 걸 후회하진 않고요. 잘 모를(?) 때니까 그런 캐릭터를 만들죠! 진짜 재밌게 썼습니다. 그런 캐 언제 또 쓰겠어요...
당수: 제 생각에도 시스로네스는 노인이라서 더 개성 넘치고 매력적이었던 것 같아요. 맨날 골골해서 사람들이 건강을 걱정하는데 여기저기 바쁘게 다니면서 여왕에게 화도 내고 나중에 대검까지 휘두르고. 사기 캐라면 사기 캐네요, 시스로네스도. 교황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에르난이 농담한 게 괜한 말이 아니었어요.
임다일: 레이테가 정색했던 것처럼 그 당시 교황은 이탈리아인 아니면 불가능했습니다.
당수: 하지만 판타지니까 해낼 겁니다! 그 정도의 사이다는 주세요! 어차피 뒷얘기는 나오지도 않는데!
임다일: 시스로네스의 꿈과 희망 자체가 사크틸라인걸요. 더 멀리 가는 게 아니라. 시스로네스가 엔딩에서 선택한 직업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바르시나와 사크틸라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면 사크틸라에 좋은 일이라 생각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소소한(?) 일을 한 겁니다.
당수: 프란세스크로 넘어갑시다. 와아아아 세스크!
임다일: 모두가 좋아하는 세스크!
당수: 세스크 못 하는 게 뭐죠?
임다일: 딱히 안 떠오르는군요. 달리는 마차에 약하다?
당수: 정녕 그것뿐인가요? 뱃멀미도 안 하던데요.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외국어 능통, 약학 능통, 스파이 노릇 능통, 검술 잘하고 잡기 잘하지, 체스 잘 두지, 연애 잘하지(?), 밤일도 잘하는 것 같고. 못하는 게 뭡니까? 생긴 것도 잘 생겼을 거예요. 거기에 고위 귀족이고. 뭐 빠지는 게 없네요.
임다일: 굳이 변명을 해 보자면 프란세스크는 조연이라서요. 본문에 나올 부분만 만들어서 쓰다 보니까 보이지 않을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고 필요도 없고 그러다 보니 약점 같은 게 딱히 안 나온 것 같습니다. 그래도 스토리 상 큰 삽질은 하잖습니까. 그러면 밸런스가 맞는 거죠!(...)
당수: 누누이 얘기했지만 프란세스크는 남주가 되어야 합니다. 조연으로 썩기엔 아까워요! 세스크 외전은요!
임다일: 네, 쓰겠습니다, 쓴다고요! 근데 당장은 《거울에 비친 왕관》의 세계 밖으로 벗어나고 싶어요.
개성 넘치는 조연들의 활약
당수: 조연 중에서 브라간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첫 연재 때는 이야기의 후반부에 나왔던 악역입니다. 그러다 유료 연재를 거치며 초반부터 등장했죠. 브라간사는 캐릭터 모델이 있나요?
임다일: 아뇨. 딱히 없습니다. 필요하니까 만들고 배치했습니다. 다만 최후를 정해 놓고 그에 맞추려고 애썼어요.
당수: 그런 것치고는 존재감이 엄청난 캐릭터였습니다. 처음에 레이테 앞에서 건방지게 굴던 때부터 시선을 사로잡더니 결혼식 때는 아예 드러내놓고 반감을 나타내고, 후반부 전쟁에서는 커다란 역할을 하고, 심지어 자기 나라에서 더 큰 사건까지 일으키죠. 지금 생각해 봤는데 브라간사가 《거울에 비친 왕관》의 주인공이었으면 엄청 스펙터클 했을 것 같아요.
임다일: 그러네요. 브라간사는 저지른 일이 화려한 데에 비하면 전면전에서의 모습이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정작 보스로서 존재감을 뽐내야 할 때 제대로 못 한 느낌이라.
당수: 야심 찬 악역이었던 브라간사의 퇴장도 인상 깊었죠. 어찌 보면 그간 벌인 짓과 대비돼서 더 브라간사를 절망시킬 수 있는 허망한 퇴장이었거든요. 사이다를 주거나 주인공들에게 후광을 비춰 줄 수도 있는 장면을 그렇게 구상하신 이유가 따로 있나요?
임다일: 일단 배경이 되었던 실제 전투의 적장이 그렇게 사라집니다. 그걸 무작정 따르라는 법은 없지만, 말씀하신 대로 그런 퇴장이 더 브라간사 입장에서 비참하겠구나 싶어서 따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너무 그대로 따르면 주인공들의 후광이 없으니 그런 결말로 설정했어요.
당수: 조연들 중 가장 아끼는 캐릭터는 누구인가요?
임다일: 조연들 다 좋아하는데요. 정말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아무래도 세스크...(...)
당수: 세르지 아닐까 했는데요. 처음 등장할 때는 이렇게 계속 나올 거라고 생각도 못 한 캐릭터였거든요.
임다일: 세르지는 좋아한다기보다는 정이 들었어요. 별생각 없이 시작했다가 정이 팍팍 들어서... 성공한 인생입니다. 찌질캐로 끝날 줄 알았습니다, 저도.
당수: 거왕 최대의 승리자 같네요. 오히려 에르난에게 호의적이었고 괜찮은 이미지였던 세르지의 형은 그 뒤로 안 나왔는데요.
임다일: 묻혔죠. 에르난에게 호의적인 인물은 프란세스크의 가족이 있으니까요.
당수: 그럼 더 많이 등장시키지 못해 아쉬운 인물이 있다면?
임다일: 바로 떠오르는 건 페레트입니다. 좀 더 매끄럽게 등장시킬걸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전쟁을 해야 하는데 바르시나 측에 군인이 없어서 나오게 된 캐거든요. 실제 있었던 전투의 승리에 큰 역할을 한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했는데 구질구질하게 출세하고 싶어 하는 성격은 제 창작입니다.
그리고 가장 미안한 캐는 심발로.
당수: 저는 블랑슈 왕비도 인상 깊었습니다. 내내 무심하게 살던 사람이었지만, 마지막에는 생기가 돌잖아요. 레이테에게 잔소리도 하고. 그런 변화가 좋았습니다.
임다일: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디테일이 아름다운 표지
당수: 표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밀회 아틀리에》에 이어 sizh 님이 한 번 더 표지 일러스트를 맡아 주셨습니다. 작업을 부탁드린 지 1년도 더 지났는데, 당시 뭘 강조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임다일: 주인공들의 대칭 구도를 제일 중요하게 여겼어요. 여러 가지가 대조되도록요.
당수: 그 결과 에르난과 레이테가 기세 좋게 서로를 바라보는 표지가 완성되었습니다. 정말 화려하고 예쁘게 그려주셨는데요. 《거울에 비친 왕관》 표지에서 제일 좋았던 점은 무엇인가요?
임다일: 레이테 머리카락이요. 진짜 짱 예뻐요.
그리고 에르난의 옷을 적당히 어레인지해 주신 점도 좋았습니다. 자료로 보내드린 15세기 후반~16세기 초반 남자 복식이 요즘 센스로는 별로 안 예쁘거든요. 근데 저는 거기에 익숙해져 있고(...) 그때의 코트 느낌을 되도록 살리고 싶었는데 적당히 보기 좋게 바꿔주셨어요. 표지 일러스트로서의 예쁨과 역덕의 욕망 사이 중심을 잘 잡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당수: 후속작을 준비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임다일: 올해는 무리고 내년 언젠가가 될 것 같습니다. 《거울에 비친 왕관》을 끝내고 후유증을 오래 앓았거든요. 방황의 세월이 좀 길었다가 이제야 진정하고 텅 빈 머릿속에 이것저것을 넣고 있습니다.
당수: 작가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임다일: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막 그럴듯하게 떠오르는 게 없네요. 호화 소장본을 돈 걱정 없이 뽑아 보고 싶습니다.
당수: 현대 로맨스, BL 등 다른 장르에 도전해 보실 생각은 없나요?
임다일: 혹시 4년 뒤에도 창작을 하고 있다면 동계올림픽 시즌물을 쓰고 싶습니다. 요즘 피겨에 빠졌더니 자꾸 그런 생각이 드네요. 4년 후면 알못 탈출은 하겠지.(...)
BL은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써 보고 싶은데 지금은 떠오르는 게 없어요.
당수: 마지막 질문입니다. 독자님들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해 주세요.
임다일: 길고 긴 인터뷰, 그리고 《거울에 비친 왕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이 인터뷰를 읽고 《거울에 비친 왕관》에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기셨다면 읽어 주세요!
읽으신 분들은, 세스크 이야기 언젠가 나갑니다. 그때 다시 찾아와 주세요! 당장은 아니어도 너무 늦지는 않을게요.
당수: 아, 세스크 얘기를 쓰면 덕녘에서 내나요?
임다일: 어, 그러게요.
당수: 그럼 2년 뒤 3회차 인터뷰에서 뵙겠습니다.
임다일: 네!
당수: 2020년까지 덕녘이 살아 있어야 할 텐데...
임다일: 힘내요, 안 사장!
당수: 수고 많으셨습니다.
임다일: 포장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